맨위로가기

가타기리 가쓰모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가타기리 가쓰모토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이다. 아사이 씨를 섬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으며,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공을 세워 셋쓰국 영지를 받았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측근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계를 조율하려 했으나, 오사카 전투를 거치며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후 사망했다. 가쓰모토에 대한 평가는 충신, 배신자 등 엇갈리며, 문화 작품에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가타기리씨 - 가타기리 사다타카
    가타기리 사다타카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형 가타기리 가쓰모토와 함께 도요토미 가문을 섬겼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겨 야마토국 고이즈미에 영지를 받았다.
  • 1556년 출생 - 스즈키 이치조
    스즈키 이치조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하며 경제 정책 수립에 관여하고, 퇴임 후 중의원 의원을 역임했으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 1556년 출생 - 우에스기 가게카쓰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센고쿠 시대 무장으로, 우에스기 겐신의 양자가 되어 오타테의 난을 겪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귀순하여 아이즈를 다스렸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패배 후 요네자와 번 초대 번주가 되어 에도 시대에 활약하다 사망했다.
가타기리 가쓰모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가타기리 가쓰모토
본명가타기리 가쓰모토 (片桐 且元)
다른 이름가타기리 나오모리 (片桐直盛), 가타기리 나오토모 (片桐直倫), 가타기리 가쓰모리 (片桐且盛)
통칭조사 (助佐) 또는 조사쿠 (助作)
계명겐코인덴 도이치레이 산에이겐코지 (顕孝院殿東市令三英元居士)
묘소교토부 교토시 다이토쿠지 교쿠린인,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세이간지
관위종5위하, 도이치노카미 (東市正)
출생1556년
사망1615년 6월 24일
아버지가타기리 나오사다
형제사다타카
배우자가타기리 한에몬 딸
자녀우네메, 다카토시, 다메모토, 나루세 유사리의 계실, 고이데 모모의 실, 하타케야마 마사노부의 정실
정치 경력
주군아자이 나가마사 → 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요리도쿠가와 이에야스
섬긴 가문도요토미 가문, 도쿠가와 쇼군 가문
직위가로, 다이묘
소속 씨족가타기리 씨 (도요토미 씨 성을 받음)
영지야마토 다쓰타 번 번주
관직국봉행
군사 경력
참전 전투시즈가타케 전투
지휘 지역이바라키 지역
다이묘 경력
이바라키 번 (茨木)시작: 1600년
종료: 1615년
다쓰타 번 (竜田)시작: 1601년
종료: 1615년
후임: 가타기리 다카토시
기타
관련 사건오사카 전투
주된 역할도요토미 가문의 가신

2. 생애

가타기리 가쓰모토는 헤이안 시대 초기 쇼군을 섬겼던 미나모토 가문의 사무라이 가문 출신으로, 시나노 지역을 다스렸다.[3] 고지 2년(1556년) 오미국에서 아사이 씨 휘하 국인 영주 가타기리 나오사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4]

가쓰모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등용되어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한 명으로 꼽히며 활약했다. 덴쇼 14년(1586년) 종5위하 시정에 임명되었고, 호코지 대불전 건설에 참여하는 등 봉행으로서 활약했다. 분로쿠·게이초의 역에서는 조선에 출병하여 진주성 전투 등에 참가했다.

히데요시 사후, 가쓰모토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가로(家老) 역할을 맡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타협을 모색하며 도요토미 가문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오사카 총봉행으로 불리며 도요토미 가문의 외교와 재정을 도맡았다.

1611년 이에야스와 히데요리의 니조 성 회견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1614년 호코지 종명 사건이 발생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호코지 범종에 새겨진 "국가안강" 문구가 이에야스를 저주하는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가쓰모토는 변명에 나섰지만 요도도노 측근들에게 의심을 받았다. 결국 가쓰모토는 전쟁을 피하고자 히데요리의 참근, 요도도노의 인질, 히데요리의 타국 이주 등을 제안했으나, 이는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켜 오사카 성에서 퇴거하게 되었다.

오사카 전투에서 가쓰모토는 도쿠가와 측에 가담하여 사나다마루 공격 등에 참여했다. 여름 전투 후 20일 뒤인 5월 28일, 가쓰모토는 교토 저택에서 60세로 사망했다.[31]

엥겔베르트 켐페르의 호코지 대불(교토의 대불) 스케치
[23]

호코지 종명
"국가안강", "군신봉락"

2. 1. 출신

가타기리 가쓰모토는 유서 깊고 훌륭한 역사를 지닌 고대 사무라이 가문 출신이었다. 헤이안 시대 초기에 가타기리 씨는 초기 쇼군과 그들의 정부에 기여한 사무라이의 전통적인 수장인 미나모토 가문을 섬겼으며, 약 500년 동안 시나노 지역의 최남단을 다스렸다.

고지 2년(1556년), 오미국아사이군 수가야(시가현나가하마시 수가야)에서 아사이 씨 휘하 국인 영주 가타기리 나오사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미상이다.[3] 시나노 겐지 명문인 가타기리 씨는 이나 재향의 가마쿠라 고케닌이었지만, 본류가 가타기리 향에 남은 한편, 지류는 조큐 연간 이후 미노국·오미로 진출하여 가타기리로 성을 고쳤다. 센고쿠 다이묘로 변모한 아사이 씨를 섬기게 된 것은 나오사다 대부터라고 한다. 수가야는 아사이 씨의 본거지인 오다니성과 산으로 이어져 있으며, 동성 지성 중 하나로 기능하는 외에, 온천이 솟아나기 때문에 탕치장으로도 이용되었다.[4]

2. 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히데요시는 아자이 씨를 대신하여 나가하마성의 성주 및 북 오미 3군의 영주가 되어 많은 인재를 모았다. 가쓰모토는 덴쇼 2년(1574년)부터 덴쇼 7년(1579년) 사이에, 같은 오미국 출신인 이시다 마사스미・미쓰나리 형제와 마찬가지로 젊은 나이에 히데요시에게 등용되었다. 모리 데루모토에 대한 중국 공격에도 종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3]

덴쇼 11년(1583년) 5월,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와 대립한 시바타 가쓰이에와의 시즈가타케 전투 (오미국 이카군)에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토 기요마사 등과 함께 활약하여, 첫 번째 창의 공을 인정받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한 명으로 꼽혔다. 이때 히데요시로부터 전공을 포상받아 셋쓰국 내에 3천 석을 받았다.

덴쇼 12년(1584년) 6월,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종군했다. 진립서에서 다른 칠본창과 함께 우마마와리 중으로 150명을 이끌고 본진을 지킨 것으로 추정된다.

덴쇼 14년(1586년) 7월 1일, 종5위하시정에 임명되었고, 이때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5] 같은 해, 호코지 대불전(교토의 대불) 건설에 작사 봉행을 맡았다(후년의 재건 공사에서도 가쓰모토가 작사 봉행을 맡았다).

이후 봉행으로서 활약하며, 도사쿠 봉행으로서 숙박 시설이나 도로 정비 등의 병참에 관여했다.[6] 또한 소령이 있던 셋쓰국을 비롯하여, 히데요시의 지배 영역 확대에 따라 탄바국[7], 야마토국이요국 등 각지에서 고보리 마사카즈아사노 나가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 등과 함께 검지 봉행에 종사하게 되었다.

덴쇼 15년(1587년), 규슈 정벌에 종군하여 군선 조달을 담당했다.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도쿠가와 가신과 함께 오다와라성 접수에 참여하여, 하야카와 나가마사와 함께 가마쿠라의 쓰루오카 하치만구 수복 조영 준비와 소령 안도 및 검지를 실시했다. 오슈 시치에서는 데와국아키타에서의 검지 외에, 아사리 사건 조사에 관여하여 당사자의 상경을 주선하고, 나가쓰카 마사이에 등에게 재정을 위임했다.

덴쇼 19년(1591년), 히데요시의 미카와국 기라에서의 사냥에 수행했다.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분로쿠의 역)에서는 동생 사다타카와 함께 출병했다. 미야기 도요모리와 함께 선발대로서 도로를 정비했지만, 비젠국으로부터 군세의 연체가 있었기에, 해로용 배의 조달을 지시받았다.[6] 수하는 겨우 200명이었지만, 부산(현재의 부산광역시) 창원성(마산성)에 주재하며, 히데요시로부터의 일기 중 학살이나 도로 보수 등의 지령을 전달하고, 2차례의 진주성 전투 등에 참가했다.

분로쿠 2년(1593년), 강화 협상에 따른 휴전으로 9월부터 10월에 귀국했다.[10]

분로쿠 3년(1594년), 후시미성 보수를 분담했다. 같은 해 분로쿠 검지에서는 셋쓰국, 가와치국 북부의 봉행이 되었다.

분로쿠 4년(1595년), 하리마국 내 등에 5800석을 가증받아 본지 4200석과 합하여 1만 석이 되었다. 이 소령은 하리마, 셋쓰, 이세에 흩어져 있었다.

분로쿠 5년(1596년) 윤7월 13일에 발생한 게이초 후시미 지진 이후에는, 그 부흥 사업과 관련된 오사카의 도시 개조 계획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이초 3년(1598년) 3월 15일의 다이고의 꽃놀이에서는 산노마루전에 어여 수행두(경호역)로서 수행했다. 같은 해 8월 15일, 고이데 히데마사 등과 함께 히데요리의 부역(보좌역) 5명 중 한 명으로 지명되어, 오사카성번에 상주하며 측근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2. 3. 도요토미 가문의 가로(家老)

가타기리 가쓰모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가로(家老) 역할을 맡았다. 1598년 히데요시 사망 후, 가쓰모토는 도요토미 가문의 시중으로 임명되었다.[3]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히데요리는 일본의 통치자가 아닌 일반적인 다이묘로 격하되었지만, 가쓰모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타협을 모색하며 도요토미 가문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1599년, 히데요리가 고다이로・고부교와 함께 후시미 성에서 오사카 성으로 이동할 때, 이에야스는 가쓰모토의 저택에서 2박을 머물렀고, 이후 두 사람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12] 가쓰모토는 히데요리에게 직접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13]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가쓰모토는 이시다 미쓰나리 측(서군)에 속해 있었지만, 이에야스 측(동군) 승리 후,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 사이의 조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2만 8천 석을 영유하는 '고나'가 되었고, 다쓰타 성을 거성으로 삼았다.[3] 또한 고이데 히데마사와 함께 도요토미 종가의 가로로 발탁되었다.[3]

이후 가쓰모토는 이에야스의 정치를 히데요리의 대행으로 승인하고 협력하는 입장이 되어, 오사카 총봉행이라고 불렸다. 구니부교와 같은 입장에 임명되어, 셋쓰국가와치국이즈미국・쇼도 섬[16]을 관할했다. 또한 지샤 부교로서, 기나이 중심의 다수의 사원 부흥 사업에 착수했다. 히데요리의 발급 문서 대부분을 가쓰모토가 취급했으며,[3] 요도도노의 신뢰도 두터웠다.[3]

1611년, 가쓰모토는 이에야스와 히데요리의 니조 성 회견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요도도노는 이에야스가 오사카 성으로 와야 한다며 반대했지만, 가쓰모토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히데요리의 상락을 설득했다.[20]

1614년, 호코지 종명 사건이 발생하면서 가쓰모토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호코지 대불(교토의 대불) 및 대불전이 거의 완성되었고, 분에이 세이칸에게 선정하게 한 범종도 완성되었는데,[24] 종명에 새겨진 "국가안강"이라는 문구가 문제가 되었다.[23]

이에야스 측은 이를 이에야스의 이름을 나누어 저주하는 것이라 해석했고, 가쓰모토는 변명에 나섰지만, 결국 요도도노의 측근들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다.[25] 가쓰모토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히데요리의 참근, 요도도노의 인질, 히데요리의 타국 이주 등을 제안했지만, 이는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켰다.[25]

2. 4. 호코지 종명 사건과 오사카 전투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가타기리 가쓰모토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가신으로 임명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가쓰모토는 히데요시의 유일한 아들이자 상속자인 히데요리와 함께 했다. 가쓰모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타협을 모색했지만, 요도도노는 새로운 도쿠가와 통치자와의 관계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요도도노는 가쓰모토의 충성심에 대해 점점 의심을 품었고, 마침내 1614년 가쓰모토를 오사카 성에서 추방했는데, 이는 이에야스의 20만 대군에 의한 오사카 전투 (1614년 ~ 1615년)로 이어졌다. 1615년 여름,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했고, 요도도노와 히데요리는 불타는 성 안에서 자결했다.

게이초 19년(1614년) 3월, 호코지 대불(교토의 대불) 및 대불전이 거의 완성되었고,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전국에서 주물 장인을 모았다.[24] 범종도 4월에 완성되었으며, 봉행 대표로서 "가타기리 토시노리 '''도요토미''' 가쓰모토"의 이름이 새겨졌다.

7월 말, 이타쿠라 가쓰시게로부터 이에야스에게 보고에 의해, 종명, 도찰 등에 의혹이 걸리는 호코지 종명 사건(교토 대불 종명 사건)이 일어난다.[25] 소덴과 혼다 마사즈미를 중심으로 조사가 이루어져, 이타쿠라 가쓰시게에 의해 대불 개안 및 공양은 연기 결정된다. 8월 13일 밤, 가쓰모토, 오노 하루나가, 세이칸 등이 슨푸로 파견된다.[26]

8월 18일에 명문에 대해 소덴이 주지를 맡는 임제종의 난젠지 및 그 하위에 속하는 교토 오산의 7명의 승려에게 검증이 명해졌고, 세이칸이 명문에 숨은 제목으로 "국가안강"과 이에야스의 휘를 사용한[28] 것은 불경으로 간주되었다.

가쓰모토[30]는 소덴 등에 대한 변명에 힘썼지만, 이에야스와의 회견은 없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히데요리의 슨푸와 에도에의 참근", "요도도노를 에도에 보냄(인질)", "히데요리가 오사카 성을 나가 타국으로 옮김" 중에서 하나를 서둘러 선택할 것을 제안하지만, 오노 하루후사나 와타나베 타다시와 같은 요도도노의 측근들에게 이에야스와의 내통을 의심받게 된다.[25]

9월 23일, 오다 노부오로부터 암살 계획을 알게 된 후 자택에 틀어박혀 경비를 굳혔다. 가쓰모토 살해를 꾀하고 있다고 여겨진 인물은 기무라 시게나리, 와타나베 타다스, 이시카와 사다마사, 아오키 가즈시게, 우스다 가네나리의 이름이 사료에 남아 있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와 몇 차례 서신 왕래가 있었지만, 옆에 있는 오다 우라쿠사이의 저택과의 사이에서, 서로의 가신이 무장하고 경계하는 사태가 되었다.

10월 1일 새벽 무렵, 가쓰모토는 일족, 가신을 이끌고 동생 사다타카 등과 함께 오사카에서 퇴거했다. 가쓰모토는 평복이었지만, 사다타카 이하 가신들은 모두 무장을 하고 있었다.[6] 같은 날, 이에야스는 오사카성 공격 출진을 결정했다.

2. 5. 최후

가타기리 가쓰모토는 오사카 성 함락 20일 후,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했으나, 할복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31] 가쓰모토는 전 해부터 기침병을 앓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보낸 가타야마 소테쓰의 진찰을 받았지만,[25] 오사카 여름 전투 후 20일 정도 지난 5월 28일에 교토 저택에서 60세로 사망했다.[31] 장례는 다이토쿠지에서 거행되었다.

가쓰모토의 가문은 17세기에 단절되었지만, 가쓰모토의 동생 가타기리 사다타카와 그 가족은 가타기리의 이름을 유지하며 ''다이묘''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 후손들은 1884년에 귀족 작위를 받았고, 1946년 작위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자작 지위를 유지했다. 여성 아이돌 그룹 NGT48의 전 멤버 니시무라 나나코는 2017년 6월 26일, 방송 프로그램 『NGT48의 니이가타 프렌드』에서 가쓰모토의 후손이라고 밝혔다.

3. 평가 및 기타

가타기리 가쓰모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으며, 오사카 전투 전후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 덴쇼 12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당시 히데요시로부터 오랫동안 조사쿠(助作)로 불렸다. 덴쇼 13년 종5위하·토우시정에 임명된 이후 나오모리(尚盛)라는 이름을 사용했다.[3] 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부터 모토카츠(且元)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3]
  • 형 겐친(玄珍)을 이어 덴쇼 17년 오미국 구사쓰시 아시우라 관음사 주지가 된 센슌은 히데요시로부터 가쓰모토와 이시다 미쓰나리의 교육을 명받았다는 일화가 있다.[3]
  • 단바국 기쓰 촌과 하리마국 기요미즈데라의 국경 분쟁 재판을 맡아 기요미즈데라 측으로부터 답례를 받았다.[3]
  • 고야산의 수확량 신고 누락이 발각되자, 하야카와 나가마사와 함께 파견되어 조사를 담당했다.
  • 『에혼 태합기』에는 야마자키 전투 직후 밤에 시체로 위장하여 히데요시를 기습하려던 아케치 미쓰히데의 측근 아케치 미쓰치카를 벤 가쓰모토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다.
  • 게이초 11년, 에도성 축성 당시 교토 쇼시다이 이타쿠라 가쓰시게 등의 기나이 직인 파견에 협력했다.
  • 게이초 19년,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긴장이 고조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윌리엄 애덤스로부터 대포, 탄약, 납 600kg을 구입했다. 가쓰모토와 오노 하루나가는 도요토미 가문이 낭인을 고용해 조련한다는 풍문에 대한 우려를 통보받고 각각 5천 석을 가증받았다.[6]
  • 에도 시대요미혼인 『에혼 태합기』 (다케우치 카쿠사이 글, 오카다 교쿠잔 그림, 교와 2년 간행, 전 7편 84권)에는 시즈가타케 칠본창으로서의 무용담이 그려져 있다.
  • 소설
  • 스즈키 키이치로, 『카타기리 카츠모토』 (쇼가쿠칸 문고, 2004년)
  • 토쿠나가 신이치로, 「카타기리 토시마사 카츠모토」 (『시즈가타케 칠본창 히데요시를 지탱한 용장들의 생애』 (PHP 연구소, 1992년) 수록)
  • 이자와 모토히코, 「빠져나가는 구멍」 (『암귀』 (신초 문고, 1989년) 수록)
  • 쿠와타 타다치카, 「카타기리 카츠모토」 (『신편 일본 무장 열전』 (아키타 쇼텐, 1989년) 수록)

3. 1. 엇갈리는 평가

가타기리 가쓰모토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 충신론:
  • 군사학자 오바타 가게노리의 문헌인 『옹 이야기』와 군담소설 『난파전기』에서는 가쓰모토를 도요토미 가문의 충신으로 묘사한다. 이들 문헌에 따르면, 가쓰모토는 도쿠가와와의 싸움을 피하고자 노력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망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책략을 제시했다고 한다.[20] 이러한 가쓰모토 충신론은 『염식태평락기』, 『본조성쇠기』 등 실록물에도 이어져 에도 시대에는 가쓰모토가 충신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20]
  • 쓰보우치 쇼요의 희곡 『기리 한 잎』은 고뇌하는 충신으로서의 가쓰모토를 그려 인기를 얻었다.[20]

  • 배신자론:
  • 칸자와 모코쿠는 『옹초』에서 가쓰모토 충신론과 오노 하루나가 간신론에 반박하며, "충의를 가장한 가쓰모토는 오사카에 활을 겨눴다. 악인으로 미움받던 오노 하루나가는 운명을 함께 했다"고 평가했다.[20]
  • 일화집 『무장감장기』에는 농민에게 불충하다고 비난받은 가쓰모토가 이에야스에게 용서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등, 가쓰모토가 불충하다는 의견도 존재했다.[20]
  • 역사학자 구와타 다다치카는 가쓰모토가 여름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 모자의 위치를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보고한 점 등을 들어 "진짜 배신자"라고 혹평했다.[20]
  •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 Jean Crasset|장 크라세영어가 쓴 『일본 서교사』에는 "이치노카미(가타기리 가쓰모토)는 공방과 마찬가지로 성격이 교활하며, 공방에게 오사카 성과 히데요리를 복종시키는 밀약을 맺고, 발각되어 공방에게 탈출하자 오사카 성은 군비와 병사 부족으로 쉽게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0]

  • 평범한 인간론:
  • 역사학자 쓰지 젠노스케는 강연 '가타기리 가쓰모토론'에서 가쓰모토는 매우 훌륭한 인물도, 악인도 아닌 평범한 인간이었다고 평가했다.[20]

3. 2. 문화적 묘사

쓰보우치 쇼요의 희곡 《키리히토하》는 도요토미 가문의 몰락을 묘사하는데, 가타기리 가쓰모토는 선한 의도와 날카로운 현실 감각을 지닌 충신이지만, 왕조 투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무력해지는 인물로 그려진다. 극의 절정에서 가쓰모토는 마침내 운명이 도요토미 가문을 덮쳤음을 한탄한다. 일본 현대 최고의 극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쓰보우치 쇼요가 쓴 이 작품(1894-95년 출판, 1904년 초연)은 "가타기리 가쓰모토"라는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현재까지도 가장 훌륭하고 인기 있는 현대 가부키 작품 중 하나로 남아있다.[3]

  • 가부키
  • * 『키리히토하』 - 쓰보우치 쇼요 작, 메이지 37년(1904년) 3월 도쿄좌 초연. 최선을 다하면서도 최악의 결과를 목도하고 고뇌하는 가쓰모토를 주역으로, 근대적인 해석으로 그린 신가부키의 수작. 이 작품이 크게 히트하면서 가타기리 가쓰모토의 이름이 일약 유명해졌다.
  • 텔레비전 드라마
  • * 『도쿠가와 이에야스』 (1983년, NHK 대하드라마) - 배우: 쿠메 아키라
  • * 『게로리의 도톤 히데요시와 여자를 다툰 남자』 (1999년, 칸사이 TV 방송) - 배우: 나카무라 토오루. 시바 료타로의 단편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
  •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2000년, NHK 대하드라마) - 배우: 코바야시 네지
  • * 『무사시 MUSASHI』 (2003년, NHK 대하드라마) - 배우: 이리카와 야스노리
  • * 『고 ~공주들의 전국~』 (2011년, NHK 대하드라마) - 배우: 미타무라 쿠니히코
  • * 『사나다마루』 (2016년, NHK 대하드라마) - 배우: 코바야시 타카시
  • * 『어떻게 할까 이에야스』 (2023년, NHK 대하드라마) - 배우: 카와시마 준야

참조

[1]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2] 서적 図説徳川家康と家臣団 平和の礎を築いた稀代の天下人 戎光祥出版 2022
[3] 기타 2001
[4] 서적 浅井長政書状 石川武美記念図書館(旧お茶の水図書館)成簣堂文庫 2015
[5] 서적 寛政譜
[6] 서적 譜牒余録
[7] 간행물 丹波の太閤検地について-多紀郡奥田谷村を中心として-
[8] 서적 伊達家文書
[9] 서적 秋田家文書
[10] 서적 片桐文書
[11] 서적 鹿苑日録
[12] 서적 片桐家朱印状
[13] 서적 豊臣秀吉研究 角川書店
[14] 서적 大津城攻防戦闘要図, 筑紫古文書
[15] 서적 徳川家康文書の研究
[16] 서적 菅家文書
[17] 서적 大日本史料「伏見御城番御所之覚」
[18] 서적 狭山町史
[19] 서적 大坂御陣覚書
[20] 서적 東武談叢
[21] 서적 イエズス会報告集
[22] 서적 パゼー日本耶蘇教史
[23] 서적 ケンペルと徳川綱吉 ドイツ人医師と将軍との交流 中央公論社 1994
[24] 서적 梵舜日記
[25] 서적 駿府記
[26] 서적 義演准后日記
[27] 서적 本光国師日記
[28] 서적 摂戦実録
[29] 서적 武徳編年集成
[30] 문서 大野治長は大坂へ報告に戻る。
[31] 서적 山本日記
[32] 서적 北川遺書記
[33] 서적 伊達政宗記録事跡
[34] 서적 寛政重修諸家譜
[35] 논문 方広寺大仏鐘銘事件をめぐる片桐且元と大蔵卿局の動向について 2021
[36] 서적 大坂御陣山口休庵咄
[37] 문서 吉川文書
[38] 서적 大三川志
[39] 서적 言緒卿記, 孝亮宿禰日次記, 東大寺雑事記
[40] 서적 日本戦史. 大阪役 http://dl.ndl.go.jp/[...] 원진사
[41] 문서 高野山文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